1. 선교사로 산다는 것 수십 년간 소식을 모르던 어릴 적 친구가 전화를 했습니다. 어떻게 알고 한국에서 이곳까지 국제전화를 했는지 전혀 뜻밖의 일이라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한참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나 봅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옆에 있던 작은 애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묻습니다. “엄마도 친구가 있어? 엄마랑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 가족과 교인들 뿐이라서 엄마는 친구 같은 건 없는 줄 알았는데.” ‘내 친구 부모들은 친구나, 친척 가족들과 어울려 야외에도 자주 가던데 나는 15살이 되도록 한 번도 우리 가족과 함께 야외라곤 가본 적이 없어.’하며 찬스라는 듯 맘 속에 있던 불만을 슬슬 토로하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말 나온 김에 다 하겠다는 건지, “엄마 아빠는 선교 일만 하는 워커 홀릭 이야. 나는 선교를 해도 아빠 같은 선교사는 안 될 거야. 자식을 잘 돌보는 선교사가 될 거야.”하더니 늘 바쁘고 피곤하단 핑계로 자신과 놀아주지 않는 아빠에 습관이 된 아이는 마당에 나가 혼자서 공을 몰고 뜁니다.
근근이 끼니를 잇던 자비량 선교시절에 자란 큰 애나, 12년 터울로 태어나 그나마 나은 형편에서 자라는 작은 애나 둘 다 아들이라서 그런지 속내를 털어놓지 않아서 나름 괜찮은 부모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아이의 가슴 속엔 아빠와 하고 싶은 것들이 탑처럼 쌓이고 있었지만 차마 말은 못하고 혼자서 꾹꾹 참고 지내온 것입니다. 초기 선교사 생활이 얼마나 고생스러웠는지 열 살 때부터 목사나 선교사는 절대 안되겠다던 큰 애, 선교는 해도 아빠 같은 선교사는 안 되겠다는 작은 애를 보며 선교사로 살아온 우리 부부의 삶을 생각합니다.
친구도, 세상 즐거움도 다 잊고 오직 선교에만 올인 한 20년의 삶을 회고합니다. 매년 성장하는 사역을 지켜본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남편의 개척정신, 아내의 내조의 결과가 아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엔 부모의 손에 이끌려 와 외모와 언어와 풍습이 전혀 다른 이국의 생 땅에다 생존의 뿌리를 내리고자 외롭게 발버둥 친 어린 자녀들의 눈물겨운 희생이 묻혀 있습니다. 말 뜻도 모르는 나이에 이미 ‘치노(중국인) 칭총창’이란 놀림에 시달려야 했으며, 치마바람은커녕 부모조차도 알지 못하는 스페니쉬와 학교생활을 혼자서 익히고 적응해야 했으며, 빠른 언어습득으로 일찌감치 선교의 동력 자로 나서야 했으니 제 나이다운 생활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내겐 딴 애들 같은 중고교 시절이 없었어.”라는 큰 애, “엄마는 아빠를 몇 점이라고 생각해? 내게 아빠는 빵점이야.” 라는 작은 애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2. 니카라과 신학교 소식 올해 3월에 시작한 니카라과 신학교가 꾸준히 제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한국 장로회신학대 학장 출신이신 박창환 목사님의 신, 구약개론과 헬라어, 허행돈 장로님의 성경공부방법에다 방학 동안엔 특강으로 박태진 선교사의 영어, 정재은 선교사의 한국어 강의까지 다양하게 가르쳤습니다. 또한 우리 신학교는 니카라과에서 유일하게 헬라 어를 가르치는 학교로 소문이 났습니다. 에스뗄리 분교에서는 박창환 목사님의 교재를 박태진 선교사가 스페니쉬로 번역한 것을 에드왈도 목사가 학생들에게 가르칩니다.
죽어도 선교사, 목사는 안 하겠다던 큰 아들 박태진 선교사가 가족과 함께 신학교 사역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비인 박태진 선교사는 통역을 전담하고 두 살 난 손주 의솔이는 두 분 교수님과, 할아버지를 비롯한 주위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함으로 제 아빠에 버금가는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방학이 되어 미국으로 떠나시는 박창환 목사님을 공항에서 배웅하다가 어린 것이 섭섭함에 겨워 엉 머구리 같이 울었다고 합니다.
선교사로 산다는 건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이 자식들에게 여러모로 정신적인 상처를 입힐 때가 많습니다. 작은 아들 태현이도 의솔이 같은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4 살 때 처음 온 단기 선교 팀과 함께 거리전도를 나가 통역도 하며 갖가지 사역을 하면서 재미있게 보내다가 팀이 떠나는 날 공항에서, 형들 누나들 가지 말라며 붙들고 울다가 그래도 가야 한다니 그럼 나도 따라 가겠다며 발버둥치며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다들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만 보다가 같은 얼굴을 한 한국사람들과 지낸 열흘이 그렇게도 좋았나 봅니다. 부모를 두고도 누나들을 따라가겠다는 네 살짜리의 울부짖음은 어느새 아이의 가슴 속에 자리한 심연 같은 외로움의 표출이었습니다.
며느리 정중은 선교사 또한 3,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속에서 에어컨도 없는데다, 모기에게 수없이 물어뜯기면서도 늘 웃는 얼굴로 어른들을 잘 모시고 있습니다. 연세도 많으신데 날씨도 무덥고 먹거리도 많지 않고 환경도 열악한 오지에서 얼마나 견디실까 염려했던 박창환 목사님(85세)은 선교 지에 오셔서 건강이 훨씬 더 좋아졌다고 하십니다. 내년엔 강의 과목을 더 늘리고 싶다며 의욕을 보이십니다. 허행돈 장로님도 처음엔 힘들어하더니 이젠 조금씩 적응이 된다고 하십니다.
지난 11월엔 사흘간 ‘좋은 목사’ 란 주제로 캐나다에서 목회하시는 임수택, 이상천, 넬슨 리 목사님과 박창환 목사님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만든 음식만 먹다가 외식을 하는 것처럼 신선함이 있었습니다. 3년째 계속된 11월 특별 세미나는 달리 광고를 하지 않고 재학생 위주로만 했는데도 소문을 들은 외부 교역자들이 30명 가량 참석을 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중 한 분은 교단 장인데 자기네 교단에서도 이런 집회를 준비해서 한국 목사님들을 강사로 초청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신학교 사역에 기도로 물질로 동참하시는 교회와 목사님과 여러 후원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돕는 90여명의 신 학생들을 대신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사역의 바퀴가 이렇듯 원활히 굴러가고 있습니다. 하루 1달러로 연명하는 저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올 한해도 무사히 지나게 하심에 감사 드리며 내년에도 더 성장하는 신학교와 제반 사역이 될 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3. 코스타리카 사역
창세교회 소식 저희 부부는 해마다 나눔의 계절인 성탄절이 다가오면 연례행사처럼 교인들 가정 심방을 합니다. 교인들이 하나같이 가난하지만 그 중에도 어려운 가정을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고 기도를 해줍니다. 그 집을 나올 때는 차마 그냥 나올 수 없어 얼마라도 손에 쥐어주고 나와야 맘이 편합니다. 타이완 출신인 제니란 자매가 있어 심방을 갔습니다. 처음 교회에 출석했을 때만해도 부부생활이 원만하다더니 그 사이 남편이 두 달 된 아기와 자매를 버리고 가버렸답니다. 홀홀 단신 코스타리카까지 와서 의지하던 남편한테 버림받고 보니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한 주 전부터 우리 교인인 쟈넷 자매의 침대에 끼어 잔다고 합니다. 제니나 쟈넷이나 어렵긴 다 마찬가지인데 한 사람만 도와주고 다른 사람은 안 도와 줄 수 없어서 둘 다에게 소액을 주었습니다. 코스타리카 사람인 자넷은 고맙다면서 자연스럽게 받아 들고, 타이완 사람인 제니는 우리 한국사람들처럼 부끄럽다며 안 받겠다고 몇 번 체면을 차리다가 미안해하며 받는 문화 차이를 보입니다. 타이완 출신 부모에 볼리비아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과테말라를 거쳐 이곳까지 흘러온 제니도 목사가 같은 동양인이라니 선뜻 우리교회로 왔고 저희 부부도 제니에겐 현지인들에게 느끼지 못했던 친근감이 쉽게 느껴졌습니다.
치리뽀 인디오 교회 소식 박성도 선교사가 처음 치리뽀에 걸음 한 90년대엔 치리뽀에 변화라곤 없더니 2000년대가 되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장 획기적인 것은 여자들의 차림새입니다. 맨 발에다 몸매를 감춘 헐렁한 샤츠와 길고 폭넓은 치마만 입던 소녀들이 지금은 부츠에다 청바지, 머리에 선 글래스까지 걸친 멋쟁이로 변하리란 것은 20년 전엔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또한 교회가 선 곳마다 바로 근처에 정부에서 지원하는 초등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학교에서는 스페인어를 배울 뿐만 아니라 하루 한끼 무료급식을 하므로 치리뽀 어린이들의 영양상태도 덩달아 좋아지고 있습니다. 또 여러 곳에 농업시험장이 생겨서 치리뽀 청년들이 농사법도 배우고 그곳에서 일자리를 얻기도 합니다. 정부에서도 의료부문이나 물질지원 부문에서 여러 가지로 예전보다 훨씬 많은 혜택을 베풀고 있습니다. 걸어서 7,8시간인 치리뽀 3교회 근처까지 도로가 만들어진다고 하니 이제 치리뽀에도 변화의 급 물살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삶이 편리해지는 반면에 20년 전에 느꼈던 치리뽀 사람들만의 원시적이고 순수한 인간성은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4. 기도제목 1) 니카라과 신학교의 발전과 부족한 통역자를 보내주시도록 2) 새 학년 장학 후원금이 부족하지 않도록 3) 박창환 목사님과 허 장로님이 건강하시도록 4) 박태진 선교사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 5) 코스타리카와 니카라과의 교회와 지도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6) 치리뽀 10개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영적 성장과, 면역성이 약한 그들이 신종플루에 걸리지 않도록
2009년에도 코스타리카와 니카라과 사역에 함께 하신 교회와 목사님, 개인후원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땅끝까지 증인되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여러분이 주님의 기쁨이 된 줄로 믿습니다. 수 년간 빛도 없이 물질로 기도로 동력 하시는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귀한 예물 보내주심으로 저희 가족이 생활할 수 있게 하시고, 의료선교로, 단기선교로 먼 곳까지 찾아주셔서 실질적인 사역에 함께하셔서 감사합니다. 입덧하는 며느리가 먹고 싶어 했던 젓갈을 보내주셔서 감사하고, 귀한 한국식품들과 예쁜 옷들, 3대 선교사 의솔이를 챙겨주신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 교회 방문 시 초면이었지만 오랜 지인처럼 따뜻이 맞아주신 목사님 들께 감사합니다. 기쁨으로 드린 교회와 여러분 가정에 좋으신 우리 하나님이
100배로 갚아주시길 기도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좋은 성탄 보내시고 은혜 풍성한 새해 되시길 기도 합니다.
2009년 12월20일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선교사 박성도, 박순옥, 박태현 박태진, 정중은, 박의솔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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